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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생활/이민일기

독일에서 블로그를 통해 글이란 무엇인가 다시 생각한다.

생전 글을 쓰지 않던 나는 독일에 오고나서부터 블로그를 통해 글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항상 포스팅을 하면서 글이란 나에게 무엇일까 생각한다. 글은 나에게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는 글은 나에대한 기록, 나와 함께 나이가 먹어가면서 과거 회상의 매개체가 되는 딱 그 정도 인 것 같다. 내가 전문 작가도 아니기 때문에 마치 일기와 같이 나의 노스텔지어를 적당히 건들이는 정도. 마치 응답하라 드라마 시리즈를 보면서 그땐 그랬었지 하면 과거 회상에 젖는 것처럼. 글은 나에게 그런 존재인 것 같다. 



하지만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가끔 딜레마에 빠진다. 내가 쓰는 글들이 블로그가 가지고있는 성향과 목적에 부합하는지에 대한 혼란. 심한건 아니고 모놀로그 성향보다는 소통과 정보전달의 목적이 강한 블로그에 경어체를 써야 할지 평어체를 써야 할지 고민하는 정도. 조금 더 들어가서 일기장에 써야할 내 글들을 여기에 쓰는게 맞는지 아닌지. 그래도 간혹 내 독백 형식의 글을 보는 사람들이 있고 애드센스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일석 이조의 구조인데 여기다 안 쓸 이유는 없는 것 같다는 결론에 소통없는 포스팅을 계속 하고 있는 것 같다.


내 블로그의 글은 소통이란 단어를 눈에 씻고 찾아봐도 없을 정도로 굉장히 딱딱하다. 아무래도 나이를 적당히 먹은 만큼 내 성향을 바꾸기 힘들어서일까? ~ 했어요. 느껴지십니까? 다음에 또 만나요! 츄스~! 아피더지엔~~~ 이런 문장들은 돈주고 쓰라고 해도 못 쓰겠다. 다행이 내 정체성이 줏대가 없진 않나보다. 마침 10년이 다 되어가는 드라이브에서 유물같은 내 글을 발견했고. 우연히 발견된 글은 역시나 내 노스텔지어를 건들였다. 내 성향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러한 부분이 내가 글을 지속적으로 쓸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인 것을 알았다. 내가 쓴 글인지도 모를 정도로 오래전에 쓴 글이다. 



징검다리


잠 못 드는 새벽에



  정신없이 하루를 끝낸 뒤 푸근한 침대에 누웠을 때, 평상시에는 나지도 않는 쓰잘데기 없는 생각들에 잠이 오질 않는 날이 있다. 그 중 대부분은 어느 날의 아쉬웠던 상황들이나 보고 싶은 사람들에 대한 생각들이다. 또 가끔은 먼 옛날 어렸을 적 기억일 때도 있고, 내생에 잊지 못할 사람들과의 추억들일 때도 있다. 잠 못드는 새벽까지 그러한 생각들은 기차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 눈앞에 필름처럼 펼쳐진다. 오늘이 딱 그런 날인 듯 하다.


  고등학교 시절 4월의 어느 저녁이었다. 눈에 눈물이 맺힌 어머니가 안방 문을 세게 닫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담배를 쥔 채 굳은 표정으로 현관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갔다. 어머니의 얼굴엔 슬픈 표정이 역력했고, 아버지의 얼굴엔 왠지 모를 약간의 죄책감과, 무엇인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어슴푸레 비춰졌다. 그리고 나는 너무나도 익숙하게 안방과 현관 사이의 거실에 멀뚱히 서있었고, 나의 감정은 그 보이지 않은 복잡한 침묵의 중심에 머무르고 있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다투는 것이 싫었다. 다툼으로 인해 틀어진 가족관계가 보기 싫기 보다는 사방으로 울리는 시끄러운 소음과, 살짝만 방심하면 튕겨 나가 버릴 것 같은 고무줄처럼 팽팽해진 분위기가 너무나 싫었다. 심지어 이런 다툼은 나만의 시간을 방해한다는 그런 이기적인 생각마저 들었었다. 아마 질풍노도의 사춘기 때라 더욱 그랬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런상황이 올 때마다 거실에 서 있다는 것에 안정감을 느꼇다. 어머니를 따라 안방으로 들어가거나 아버지를 따라 밖으로 나가지 않고 중립을 유지하면 그 둘만의 대립에 대한 나의 의견을 낼 필요도 없었고, 그 달갑지 않은 상황에서 억지로 발버둥 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가끔은 그 말다툼을 아예 못 들은척 하기도 하고 내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가버리곤 했다. 하지만 그날의 다툼만큼은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꼇다.


  다른 일반적인 부모님들처럼 전에도 사소한 말다툼을 하시곤 했다. 전화기를 살 때 무선을 살지 유선을 살지, TV를 살 때 몇 인치로 살지, 집이 지저분하다든지, 빨래를 널지 않았다든지, 하지만 이 다툼은 그런 때와 확연이 달랐다. 다른 때와 같이 일상적이고 사소한 다툼이었다면 적어도 내 기억에 남아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집안 전체 분위기를 엎어버린 그 때의 다툼은 부모님 두 분 어느 한쪽의 잘못도 아니었다. 두 분 사이의 싸움의 원인은 바로 나였다.


  기억을 끄집어내자면, 나는 청소년기는 사건사고 그 자체였다. 대놓고 나쁜 짓을 하고 다닌 건 아니었지만,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가족에게 도움하나 되지 못했던 첫째 아들이었다. 공부를 월등히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학교에서 모범생도 아니었다. 부모님도 학교에 불려 오신 적도 꾀나 되고, 학생부실이나 교무실에 불려 간 적도 다른 친구들에 비해 많았었다. 가족도 인생도 이 세상도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철없던 생각들은 하나의 큰 걸림돌이 되어 나 자신뿐만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마저도 괴롭히고 있다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그날 부모님 간에 언쟁이 있기 전에 나는 경찰서에 있었다. 그 철없던 청소년 시절 나는 친구들과 돈을 모아 50cc 배기량인 스쿠터 한대를 샀었고, 그것이 젊음이라는 철없는 생각에 도로를 질주하곤 했다. 그리고 그날, 나는 무면허로 경찰에게 잡혀 경찰서로 이송됐다. 눈앞이 깜깜했다. 부모님께 죄송하고 가족에게 미안해서가 아니었다. 나 자신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이기심이라는 절벽의 끝자락에 서있었다. 


경찰서로 부모님이 오셨다. 그리고 난 귀가 조치되어 집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부모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나 역시 일단 빨리 집으로가 내방에서 쉬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차 앞을 가로막는 수많은 신호들과 다른 자동차들만이 내 신경을 건드렸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스쿠터 좀 탄 게 뭐 큰 잘못이라고 혼내겠어?’


집에 도착했을 때 생각했던 대로 부모님은 나에게 딱히 별말씀 하시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경찰서라는 곳에 갔었다는 놀랐던 가슴에 그리고 풀린 다리로 거실 소파에 앉았다. 어린나이에 내가 저녁 뉴스에 나오는 범죄자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렇게 안도의 한숨과 함께 아무 일 없이 하루가 가는 듯 했다.


집안은 차안에서와 같이 조용했다. 그 쥐죽은 듯 조용했던 침묵은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깨졌다. 부모님 사이에 몇 번의 말싸움이 오고갔다. 그리고 그 다툼은 풍선처럼 순식간에 부풀어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안은 난장판이 됐다. 무기만 없을 뿐, 완전 전쟁터였다. 이 공사장 소음처럼 시끄럽고 듣기 싫은 언쟁은 아버지가 내뱉은 거침없는 말 한마디에 마침표를 찍었다. 


“도대체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켰기에 애가 저따구야?”


평소에 모든 자식교육은 어머니가 하는 게 옳다는 아버지의 고지식한 철학에서 나온 말이었다. 어머니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으셨다. 아니, 못하셨던 걸까. 아마 그 말은 아주 날카로운 창이 되어 어머니의 마음을 정통으로 찌른 듯 했다. 이 말 한마디에 나는 처음으로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고여 흐르는 것을 보았다. 이상하게 마음이 너무 아팠다. 세차게 닫히는 안 방문 소리만이 정적을 깼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항상 두 분들 사이에서 억지로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슬픔에 닿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슬프실 때 딱히 기댈 누군가의 어깨조차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또 아버지에게도 쉽게 말을 걸 수 없었다. 아버지가 어떤 기분으로 하루를 보냈고 얼마나 큰 짐을 짊어 메고 있는지 나는 물어볼 수 없었다.  나는 언제나 그러한 상황에 마음을 닫고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는 것에 익숙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부모님 사이의 다툼에서 그런 나의  무관심은 무능력이 되고 있었다.


평소와 같이 눈과 귀를 틀어막으려 했는데, 여러 가지 생각에 갑자기 뭔지 모를 불안감과 두려움에 내 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평소 때라면 나는 나의 무의식적 충동을 따라 내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언쟁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겠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 전무했던 큰 싸움의 주체가 나였기 때문이기도 했고, 이번에도 내 스스로 장님과 벙어리가 된다면 나 자신에게 실망이 너무 클 것 같았다. 또 가족 간에 앞으로도 있을 수많은 복잡한 감정들을 해결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머니를 따라 안방으로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방은 깜깜했다. 그리고 그 어두운 방안에서 어머니는 조그마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침대에 앉아있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할지 몰랐다. 어떻게 말을 해야 어머니의 기분에 맞출 수 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가 오직 할 수 있었던 것은 손을 뻗어 어머니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 손을 통해 어머니가 내 모든 마음을 이해해주기만을 바라는 것뿐이었다. 잠시 동안 또 침묵이 흘렀다. 나는 내가 하는 행동이 맞는 것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아무 반응이 없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마도 혼자 계시고 싶나 보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의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그때 어머니는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주셨고, 그 감촉에서 나는 어머니가 내 마음을 이해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마비되는 것 같던 내 몸과 마음도, 내가 가지고 있던 복잡한 감정들도 한순간에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이 한바탕 요란한 소동에 집안 분위기는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밥을 먹을 땐  ‘딸그락, 딸그락’ 수저소리가 미치도록 크게 들렸고, 집안은 TV에서 나오는 우리 가족과는 친분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이 어두운 밤의 무덤 같은 분위기는 누구 한명의 잘못이 라고 하기 어려웠다. 생생하게 기억나는 그 어색하고도 음침한 분위기는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그렇게 천천히 그 어색함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마침내 아버지가 먼저 어머니에게 사과를 하셨다. 아마도 아버지는 생각 없이 뱉어내버린 몇몇의 말실수들을 인정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았다. 아버지의 사과를 끝으로 그 심난했던 무언의 언쟁은 막을 내렸고, 언제 그랬냐는 듯 또 다른 좋고 나쁜 추억들에 묻혀 기억의 틈새로 사라져 갔다. 


그 전쟁 같던 밤은 나에게 아직도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날 이후로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꼭 나나 동생 때문이 아니더라도 몇 번 다투셨던 걸로 기억난다. 물론 그때만큼 크게 다투시진 않으셨지만 말이다. 요즘도 가끔 사소한 말다툼을 하시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더 이상 거실에 서있지 않는다. 어려운 상황을 피해 중립에 서있으면 그 귀찮을 것만 같은 갈등들을 피하기는 쉽지만, 그 행동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지금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철없던 생각으로 가득 차있던 중·고등학교 때의 나보다는, 학교에서도, 더 나아가 사회에서도 중간에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고 싶다. 하지만 가끔 이러한 기억들로부터 얻은 배움들을 망각하고 지낼 때가 있다. 그럴 땐 이 때의 기억들을 되새기곤 한다.


무수한 생각들이 지금 내 달콤한 잠을 뺏어간다. 그래도 가끔은 이러한 기억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것 같아서 너무나 소중하다. 벌써 시계의 시침은 숫자 3을 지나고 있다. 숫자 3을 보니 고3 일 년 동안 힘들고도 즐거웠던 고등학교 친구들과의 추억들이 생각난다. 내일은 아마 학교에 지각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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